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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반석인터넷 교회에 들어오심을 환영합니다.

우리 성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연이란 없습니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던, 입을 다물 수 없을만큼 기쁜 일이었든 다 하나님의 손길안에 있습니다. 결국 모든 일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에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겐 신앙성장의 축복을 체험케됩니다. 너무나 지혜가 가득하신 멋장이 주님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영어이름에는 "Korean"이 없으며 한국이름에도 "한인"이란 말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Korean American"되어짐을 부끄러워함도 아니요 더우기 무시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와 문화와 인종의 차별을 극복하며 교회의 본질에 더욱 충성하기 위함이며 어떤 사람이라도 이곳에 들어와 한 교회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피흘리심은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유대인과 우상숭배의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들이 예수의 피로 허물어졌습니다. 한인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누리면서 타민족을 품에 안고 즐길 수 있는 다양성의 풍요가 예수의 피안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리 한민족의 배타성은 가히 세계적입니다. 중국의 화교가 정착치 못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손에 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안에 들어오면 배타성이 봄볕에 눈녹듯이 사그러집니다. 민족의 원수로 여겨지던 일본에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가 하면 회교도의 국가에 평신도 선교사들이 생명을 담보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반석의 울타리에는 성령이 운행하고 계시기에 어떤 종족도 더불어 신앙생활할 수 있는 분위기로 다듬어져가길 바라며 또한 노력합니다. 새로운 땅 10에이커위에 펼쳐질 하나님의 집 건축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모들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다양성속의 통일성을 누림은 오직 한 성령, 한 성경, 한 마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한 목회자의 비젼이 모두에게 동일한 교회의 비젼으로 일치되어 온 컬럼버스 지역의 든든한 하나의 반석되길 기대합니다.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한 도구로 반석 인터넷 교회가 날마다 든든히 세워져 가길 기대합니다. 이사의 분주함 속에서도 인터넷 교회의 기초와 뼈대를 세워주신 황린주 집사님과, 교수직의 번잡함 중에서도 팀장을 맡아 수고하시는 정승우 집사님과, 성실한 인터넷 선교팀의 윤종연 교우님, 윤종현 집사님, 조미자 집사님 그리고 선교팀을 사랑으로 섬기실 장재영 전도사님 위에 우리 주님의 평안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담임목사 소개

  1. 1950년 8월 5일 대구에서 박경일 성도와 최수흔 권사의 4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살에 서울로 올라와 가난한 동네 인왕산을 배경으로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2. 1967년 11월 셋째 주일부터 집 근처의 영천교회(고신 교단)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홍성철 교수님(그 때는 무서운 영어 선생님)과 친구인 김광수 선교사(그 때는 화끈한 역도 선수)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한국 조선산업의 거장인 한흥기 사장(그 때는 의리의 농구 친구)의 인도로 동네 교회에 발을 디뎠다.
  3. 1972년 9월경부터 약 3년 6개월간 신장염을 위시한 복합적인 병들과 싸우면서 임마누엘 하나님과 능력의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목회자의 비젼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에 다니던 서울농대 농공학과 (현 서울 시립대학교)를 자퇴하면서 서울 고려신학교로 옮겨 대학부(신학사 과정, BA)를 졸업하였다. 그 즈음에 군입대 신체검사에서 병종을 받아 군복무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생각한다.
  4. 1978년 3월1일 김옥희 님을 만나 현 2남 2녀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대학시절부터 지방색이 난무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며 기도하던 중에 전라남도 목포산 아내를 우연히(?) 맞아들이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결혼식 전날 고려신학교(신학석사 과정, M.Div)를 졸업하였다. 그 신학교에서는 유학을 준비하는 나에게 대학부 영어강독을 가르치는 특권을 허락해 주어서 1년간 영어를 더욱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5. 1979년 8월 14일 간호사인 아내와 더불어 미국 이민 생활을 뉴욕에서 시작하면서 갖가지 직업을 파트 타임(part time)으로가져 보았던 것이 이민자들의 어려운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허드슨 강변의 창고, 야채가게, 생선가게, 샌드위치 가게, 등에서 일하던중 중국계 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은행(City Bank)에서도 근무했다.
  6. 1985년 11월 정들었던 6년여의 뉴욕생활을 정리하면서 너무나 감사했던 것은 사모가 두 자녀를 낳으며, 사모의 위치를 지켜 교회들을 섬기며, 힘들었던 봉제공장 생활을 건강히 감당했음이다. 또한 서머나 교회(하찬권 목사)에서 교육목사로, 퀸즈장로교회(장영춘 목사)에서 교육목사로, 뉴욕장로교회(이영희 목사)에서 부목사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며 교제를 나누었음이다. 또한 어려운 와중에서도 수업료가 비싼 뉴욕대학교에서 영어를 1년간 공부했음과, 필라델피아에 있는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 Th. M)를 뉴욕에서 오가며 2년간 공부할 수 있었음이다.
  7. 2006년 6월에 이르러 컬럼버스 반석장로교회를 섬기는 특권을 누린지가 만 20년이 넘게 되었다. 건강때문에 주일강단을 못 지킨 적이 없었고, 현 위치의 교회에서 예배당과 교육관과 친교실(체육관 겸용)을 봉헌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며, 컬럼버스 시의회의 기도회를 가끔 인도하며, 외국인 전도기관(International Families Ministry)을 이사로 섬기며, 지역 교역자 협의회 회장을 몇 번 역임하며, 그러면서도 노회의 목회위원으로, 전국한인교회협의회의 협동 총무를 지내며, 동남부대회 한인교회협의회 회장직 등을 감당할 수 있었음은 오로지 우리 주님께서 붙잡고 사용하신 은혜때문이다.